섣달 그믐 (除夕)의 유래와 풍속

2024-02-03

추시 (除夕,제석,  음력 섣달 그믐날 밤)는 일반적으로 음력 12월의 마지막 밤을 일컬으며, 속칭 이날은  '묵은 해는 이날에 이르러 사라지고 내일이면 새해가 된다'고 하여 제세(除岁)라고도 불렀다. 즉, 중국어에서 '제(除)'자는 '제거하다, 교체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섣달 그믐날의 유래 

섣달 그믐날은 선진시대의 축제(逐除)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여씨춘추 계동기(吕氏春秋·季冬纪)'에 따르면 매년 막바지에 황궁에서 '대나(大傩)' 의식을 거행하고 북을 쳐서 '돌림병 귀신'을 쫓아내고자 했는데, 이것을 축제(逐除) 라고 하며, 이것이 '섣달 그믐날' 절기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섣달 그믐날, '제석(除夕)'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일찍이 서진 주나라 '풍토기(风土记)'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 '섣달 그믐날은 아침까지 잠을 자지 않으며, 수세(守世)라고 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고대에는 '섣달 그믐날'에 대해서 여러가지 별칭(除傩、除夜、逐除、岁除、大除、大尽)이 있었다. 

그믐 풍습 : 춘련 붙이기 

섣달 그믐날(除夕), 집집마다 문에 대홍춘련(春联)을 붙여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평생 춘련 쓰기를 좋아했던 라오서는 "춘절을 맞으며 춘련을 붙여야 한다. 빨간 종이에 검정색 글씨, 문 옆에 붙여놓으면 확실히 기쁨이 더해진다.”고 했다. 

춘련은 중국 송나라 시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기원은 의춘첩(宜春帖), 도부(桃符), 연상시(延祥诗)의 세 가지 방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의춘첩(宜春帖)은 춘련의 기원 중 하나다. 일명 '춘서(春书)'라고도 하며, 남북조 시기에 이미 출현했으며, 사람들이 복을 기원하는 물건으로, 입춘날에 색지를 잘라 '의춘(宜春)'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문기둥에 붙이거나, 또는 다른 좋은 말이나 글귀를 만들어 문간에 붙이기도 했다.

도부(桃符)는 춘련의 또 다른 기원이다. 도부는 민간에서 춘절 때에 복숭아나무판에 신차(神荼), 울례(郁櫑) 두 신을 그려 귀신을 쫓던 물건으로, 옛 전설에 따르면 동해 도삭산에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고, 복숭아나무 아래에는 모든 귀신을 주관하는 신차와 울례가 있다고 전해진다. 해를 끼치는 귀신이 있으면 그것을 꽁꽁 묶어 호랑이에게 먹인다. 후에 사람들은 도부에 상서로운 글귀를 적었다. 

연상시(延祥诗)도 춘련의 기원 중 하나다. 춘첩자(春帖子), 춘첩자사, 첩자사라고도 하며, 고대 조정에서 입춘(立春) 때에 한림문사가 첩자사를 지어 바쳤다. 연상시의 내용은 경물을 묘사하고 승평을 노래하거나 바른 충언을 위주로 했으며, 문자는 똑바르게하여 오언, 칠언 절구가 많고, 주휘의 '청파잡지(淸波杂志)'는 바로 구양수·소식의 춘첩자로 권고한 것을 위주로, 사마광은 해서식을 썼다. 이 시와 사들은 궁문과 궁원의 각 전당과 누각에 붙여졌는데, 송나라 때 성행했다.

이후 춘련은 민간 도부, 의춘첩, 궁중 춘첩자가 서로 영향을 끼친 결과물로서 길한 의춘첩과 흉을 피하는 도부가 혼재되었고, 글귀는 두 구절로 단순화 되고, 나무판은 종이로 간소화 되었다.   

송나라 때 제지술과 인쇄술이 발달하여 송나라 때 종이 춘련 형태가 생겨났고, 일종의 풍습이 되었다. 

청나라 때, 춘련을 붙이는 풍습이 이미 매우 보편화되었다. 당시의 '연경세시기(延京世記)'에서는 당시 북경성에는 섣달부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춘련을 썼는데, 춘련의 색깔은 당시 등급 구분이 있어 민간의 춘련은 주전이나 붉은 종이를, 내정이나 종실은 붉은 테두리나 푸른 테두리의 흰 종이를 사용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춘련을 붙일 때 대련의 규칙에 따라 상련의 끝 글자는 측성(仄声·병음에서 삼성과 사성)이어야 하고, 하련의 끝 글자는 평성(平声·병음에서 일성과 이성)이어야 한다. 상단은 문 오른쪽에, 하단은 문 왼쪽에 붙여준다. 

그믐 풍습 : 밤 지새우기

수세(守岁 shǒusuì) 는 밤을 새어 새해를 맛이하는 것(熬年)으로, 섣달 그믐날 밤, 등불이 환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구영신하며,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말하다.  맹원로 '동경몽화록' 에서는 "깊은 밤 폭죽가 소리를 듣고, 집 난로에 둘러앉아 밤을 새워 잠을 자지 않는 것을 '수세(守岁)'라고 한다." 고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수세의 풍습은 세월을 아쉬워하는 마음도 있고,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좋은 희망을 주는 마음도 함께 있다고 볼 수 있다.

옛베이징 민속에서는 설을 쇠는 것에 '삼세'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수세(守岁), 압세(压岁), 채세(踩岁)를 말한다.  수세는 수세화, 조세 등으로도 불렀으며, 그 유래가 깊다. 새해 전야에 밤을 새는 수세는 민속활동에서 주로 점세화, 수세화로 표현되며, 즉 모든 집에 촛불이 켜지고 온 가족이 모여 새해를 맞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섣달 그믐날 밤에 연등과 촛불이 밤새 꺼지지 않는 것을 '조허소(照虚耗)'라고 하는데, 이렇게 불을 켜고 밤을 보내면, 새해에는 가산이 넉넉해진다고 한다.

그믐 풍습 : 온 가족 함께 식사하기

섣달 그믐날(除夕) 저녁은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데, 이를 년야반(年夜饭 niányèfàn), 단원반(团圆饭 tuányuánfàn), 합가환(合家欢 héjiāhuān) 이라고도 하며 , 연중 가장 중요한 가족 식사다. 

'형초세시기' 기록에는  "세밑에 집집마다 먹을 것을 갖추고, 새해를 맞이하며, 함께 술과 음식을 즐긴다"고 했는데, 이로 보아 적어도 남북조 시기에 이미 년야반의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한 끼 식사를 하며 송구영신을 한 것은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연경세시기' 에는 섣달 그믐날 밤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설을 쇠었으며. 술이 나열되고 등촉이 휘황하며 여자와 아이들이 주사위를 던지며 즐거워한다" 고 기재되어 있다.  이 저녁 가족 식사는 천천히 먹는데, 등불을 켤 무렵부터 자리에 앉아 밤늦게까지 먹는 사람이 있다.

옛 베이징의 년야반에서는 생선과 고기 외에도, 겨자돈, 깍둑썰기한 장아찌, 산사나무떡과 같은 상큼한 반찬으로 기름기를 없애거나 식욕을 돋게 하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압권은 교자만두(饺子)다. 옛 베이징의 설날 만찬에서 교자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으며 특히 고대에는 조상과 신을 섬기는 제물이기도 했다.

그믐 풍습 : 교자 만두 빚기 

"섣달 삽심일 , 납작한 음식을 먹는다" 여기서 납작한 음식, 즉 교자만두(饺子)다. 교자는 동한 시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의성 장중경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교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민속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민간에서는 '맛있어도 교자만 못하다'는 속어도 있다.  새해 명절이 되면, 교자는 제철에 없어서는 안될 진미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원단 때는 풍성한 음식에 빠지면 안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납작한 음식을 먹어야하는데, '각자(角子) ' 라고 불렀으며, 해가 바뀌는 의미를 가진다." 했다. 새해에 교자만두를 먹는 것은 길하다는 의미로 송구영신을 말한다. 속담 중에 "대한 소한, 교자를 먹고 설을 쇤다'는 말이 있다. 섣달 그믐날 밤이 되면 가장 중요한 행사중 하나는 바로 온 가족이 함께 교자 만두를 빚는 것(包饺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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