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묘 (太庙) 는 베이징 천안문 동측에 위치하며, 현재는 베이징시 노동인민문화궁(北京市劳动人民文化宫)으로도 불린다 . 이곳은 원래 명청 시기 황제들이 선조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자금성과는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명 영락 18년 (1420)에 지어진 태묘와 사직단(社稷坛)은 '좌조우사 (左祖右社)'의 전통 규제에 따라, 자금성 앞측 좌우에 분포하며, 황제가 제사가 참가하기 편하도록 하였으며, 궁궐의 전면에 배치함으로서, 황권지상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태묘는 명 영락18년에 건설되었으며, 명청 양대 황실의 조묘로서, 천안문 서측의 사직단과 서로 호응을 하며, 좌조우사의 격식을 형성한다.

태묘의 건축분포는 직사각형으로, 3중 담장을 설치하였다.
먼저 외담 안쪽은 절대부분면적이 송백 나무로 복개되어 있다. 두번째 담장 안측은 태묘 주체건축군이다. 마지막 안측의 담장은 태묘의 핵심건축을 감싸고 있다.

태묘에 들어서면, 먼저 높다란 나무들이 맞이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태묘를 건설하고 3년이 지나도 나무 한 그루 살아남지 못하자, 명 성조가 크게 노하여, 나무를 심은 많은 인부들을 이곳에서 처벌하였다고 한다.
어떤 이가 황제가 친히 한 그루를 심기를 제안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주겸이 직접 심은 나무가 잘 살아났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질서졍연한 숲 옆에, 독립적인 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은 '태자림(太子林)이라 부르며, 명나라 태자들이 직접 심은 곳이라 하며, 다른 곳에 비해 비뚤비뚤하여, 오히려 특색이 있다.

내담, 즉 두번째 담장의 남문은 극문(戟门)이라 부르는데, 문 앞쪽에는 7개의 한백옥 석교가 작은 개울 위에 걸쳐있다. 극문의 지붕은 곡선이 아름답고, 처마가 비교적 크며, 대들보 구조는 간결하며, 천정은 화려하며 섬세한 것이 전형적인 명나라 전당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극문 안쪽에는 원래 주칠의 창거치대 8개에 120개의 창(戟)이 있었는데, 1900년 팔국 연합군 침략 시에, 모두 도둑맞았다고 한다.

극문 안쪽으로 중추선 상에는 전-중-후 3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곧 태묘의 주체건축군이다.

전전(前殿)은 제사를 지내는 전당으로서 향전(享殿)이라고도 부르며, 황제가 제사 시에 예를 행사는 곳으로, 면적은 11간이며, 겹처마 무전정에 황색유리기와로 덮여 있다. 태묘의 편액이 바로 이곳에 걸려있다.

이곳 향전은 명청 양대시기 황제가 조상제사 대전을 행사던 장소였다. 매년 사계절마다 지내는 제사를 시향(时享), 세밑 제사를 합제(祫祭)제 불렀으며, 등극, 친정, 책립, 정전 등 국가중대사의 제사를 고제(告祭)라 불렀다.

전당 내부에는 목제금칠신좌를 설치하고, 신좌 앞에는 제사용기를 두었으며, 볍씨, 과수, 제물, 술 등을 놓았다. 제사시에는 선조패위가 침전에서 옯겨와 이곳 신좌에 잘 놓고, 엄격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향전의 전체 기세는 웅장하고 엄숙하면서도 소박하다. 당시 제사를 지낼 시에 향불을 피우고, 의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종과 북을 울리고, 소악을 연주하고, 가무가 펼쳐지는 등 중화 조상제사 문화를 집중 구현하였다.

중전(中殿)은 전전의 뒤쪽이며, 침전(寝殿)으로도 부른다. 면적은 9칸, 바닥 기대 부위는 한백온 수미좌이며, 전당 앞쪽에 월대가 있고, 그 위에 돌난간이 감싸고 있다. 중전의 동서배전은 각 5칸이며, 용도는 제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후전 (后殿)의 형태와 규제는 중전과 같으며, 조묘(祧庙)라고도 부른다. 청나라 건국 전의 4대 제왕과 제후 신주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후전의 동서배전은 각각 5간 규모이며, 그 형제는 중전 동서배전과 같으며, 역시 제기를 보관하던 장소다.

태묘의 전체 배치를 살펴보면, 구도가 엄밀하고, 형제는 위엄있다, 홍색담장, 황색기와, 한백옥 기좌 등은 황성 내에서 자금성 3대전 건축군에 버금가며, 규모는 심지어 자금성 후삼궁보다 더 크다.
건축군은 측백나무들이 감싸고 있으며, 곧고 높이 솟아 있어, 태묘가 가지는 황실 최고 제사건축군에 장엄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주소 :北京市东城区东长安街
테켓 :문화궁 입장 :2元/人
태묘 전람 中华和钟展(太庙殿内):15元/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