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민족] 요족의 세시풍속

2020-05-18

혼인풍속:

요족은 일부일처의 혼인제도를 실시한다. 요족은 보통 청춘남녀가 가당절 기간 대창을 부르는 방식으로 사랑을 언약하거나 기타 도경을 통해 자유연애를 한 뒤 부모의 동의를 거쳐 결혼에 이르거나 부모가 혼인을 정해주어 결혼하는 두가지로 나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 요족은 타민족과 통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국 후 정부가 민족평등정책을 시행하면서 민족간의 갈등을 해소해 타민족과 통혼하는 현상이 꾸준히 늘었다. ‘중국민족통계연감 2006’에 따르면 2000년도에 요족과 타민족의 통혼율은 26.46%에 달했다. 요족은 결혼시 결혼피로연을 성대히 차린다.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피로연에는 마을의 어른들을 꼭 모시며 신랑신부가 합환주를 마신다. 요족은 결혼 전에 신랑측이 현금과 돼지고기를 신부측에 예물로 전한다. 결혼 후에는 신랑 집에 정착하거나 양가 부모 집에 엇갈아 거주할 수도 있으며 여자가 먼저 본가에 돌아갔다가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시댁에 돌아와 살수도 있다. 요족의 독특한 혼인풍속을 본다면 요족의 한 갈래인 남전요(藍靛瑤)는 데릴사위를 맞는 혼인풍속이 있고 백두요(白頭瑤)는 ‘보쌈혼’이 유행한다. 광서남단(南丹)대요채(大瑤寨)와 룡승동락(龍榺同樂), 반반(盤胖) 등 지의 요족들은 과거 고모의 딸은 반드시 외삼촌의 아들과 결혼해야 하며 외삼촌이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다른 사람과 결혼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근친 통혼의 구습은 새 중국 창건 후 폐지되었다.

출산 풍속:

요족의 여성들은 임신에서 출산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금기가 있다. 임산부는 익지 않은 과일을 따거나 가축을 도살해서는 안된다. 또 출산시 문 앞에 나뭇잎이나 벼짚을 걸어 표식을 해두어 외인의 출입을 막는다. 임산부는 분만 후 한달 동안 동네 나들이를 하지 못하며 아기가 태어난 날로 본가에 희소식을 전하고 생강 술을 보낸다. 만일 데릴사위일 경우 아기의 부친이 자기 집에 돌아가 소식을 전한다. 이 때 술 한 잔과 닭고기 몇 점, 생강 한 조각을 갖고 가는데 여기서 생강은 특수한 함의가 있다. 남자 아기를 낳았을 경우에는 완정한 모양의 생강을 갖고 가고 여자 아기를 출산한 경우에는 생강을 조개 모양으로 쪼개어 갖고 간다. 부모들은 생강의 모양새를 보면 남자아기인지 아니면 여자아기인지 대뜸 알아차린다. 아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출생 3일 뒤 ‘선생공’(先生公) 또는 사공(師公)을 청해 명명식을 갖는다.

장례 풍속:

대부분 지역의 요족은 토장을 선호한다. 하지만 광서 금수(金秀)현 육납(六 拉)의 차산요(茶山瑤)는 화장, 귀주 려파(荔波)현 요녹(瑤麓)향의 청요(靑瑤)는 암동장(巖洞葬)을 행한다. 광동 연남(連南)팔배요(八排瑤)는 망자를 의자에 묶어놓은 뒤 출빈시 가마를 들어올리 듯 들어올려 묘지에까지 메어 나른다. 이를 ‘유시장’(游尸葬)이라고 한다. 과거 광서 금수의 차산요나 화람요(花藍瑤), 요요(坳瑤)는 아이들이 인간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출산을 관장하는 ‘화파신’(花婆神)이 조화라고 여겨 아이가 5~6살 전에 요절하면 낡은 솜과 낡은 의복, 종려피로 시신을 잘 감싼 다음 대나무광주리에 넣어 심산 속의 오래된 나무에 걸어놓는 괘장(掛葬)을 치러 아이의 영혼이 ‘화파신’한테로 돌아가 환생하도록 했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요족의 장례풍속도 끊임없이 변화를 가져왔는 바   오늘날 이런 풍속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많은 요족 지역의 농촌들에서는 주로 토장을 하며 소수의 경제문화가 비교적 발전한 지역에서만 화장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C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