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문(正阳门)은 명청 시기의 베이징 내성의 정남문으로 전루(箭楼), 정양문 성루와 옹성으로 조성되었다. 그 위치가 베이징성 중추선의 남쪽부분으로, 베이징성 9대 성문 중의 으뜸격이다. 보통 정양문은 전문(前门)이르고 부른다.
명 주체 황제는 베이징 도읍 건설을 명했다. 명 정통원년 (1436)에 이르러, 성문 건설을 시작하였는데 정통4년(1439)에 준공되었다. 정양문은 바로 이때 만들어진 베이징 내성 9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등급이 가장 높은 성문이 되었으며, 그후에 여러차례 보수, 개조를 거쳐왔다.
원래 정양문 전루 앞에는 호성하(护城河)가 존재했으며, 강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그 위에는 넓찍한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정양교(正阳桥)였다. 정양교 난간 망주에는 석사자 조각이 있었고, 다리 남쪽에는 석사자 한 쌍과 큼직한 패루가 있었다. 패루 앞쪽이 바로 전문대가(前门大街)이며, 그 남쪽으로 영정문(永定门)으로 이어진다.
민국시기, 호성하가 메워지고 도로로 바뀌어, 정양교는 철거되었으며, 석사자는 이때 북쪽 전루 성문 앞으로 이동되었다. 이 석사자는 현재 베이징 중추선(中轴线)상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석사자로, 베이징성을 지키는 맨 앞의 석사자라 할 수 있다.

이 석사자 상은 명나라 시기에 제작, 체격은 큼직하고 기세는 위엄있다. 높이는 약 2.2미터, 하부 기좌까지 합치면 전체 높이는 약 2.85미터가 된다.
그 스타일을 보면 명나라 초기에 속하며,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자세로, 몸통과 네 다리의 조각은 간결하고 부드럽게 처리했다. 가슴 앞의 비단띠에는 돌출된 回 문양이 연속되며, 가운데에는 방울이, 양측에는 술이 조각되어 있다.
다리의 근육은 풍만하게 표현되었고, 앞다리 안측에는 작은 발가락 하나가 더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형식은 현재까지도 응용되고 있으나, 그 의미는 정확히 고증되지 않았다.
머리는 앞을 주시하고, 머리 뒤 갈퀴털도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다. 양 귀는 위로 젖혀져 있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있으며 , 코는 둥글둥글하다. 커다란 입은 으르렁 거리듯 벌리고 있으며, 평평한 앞니와 송곳니가 표현되어 있고, 혀 끝은 위로 감겨 향하는데, 마치 크게 소리 짖는 듯 하다.
정양문 석사자 상은 출입문을 지키는 맹수의 용맹함과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양문 전루 양쪽에도 두 쌍의 석사자가 있다.
정양문 전루는 원래 양측에 옹성 성벽이 있었으며, 그 안쪽에는 옹성 성벽으로 오르는 비탈형 마도가 설치되었다. 1915년 6월 16일, 베이징시는 외국 전문가를 불러 정양문에 대한 대개조를 준비했으며, 결국 정양문 성루와 정양문 전루를 연결하는 옹성을 철거하여 성루와 전루가 독립된 건물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개조공사 중에 원명원(圆明园) 폐허 중의 석사자와 청룡교 서쪽 공덕사(青龙桥 功德寺) 앞의 석사자를 전루 양측 계단 앞에 옮겨와 장식했다.
이 두 쌍의 석사자의 체격을 보면 큰 차이는 없으나, 외관상으로 보면, 동측 석사자의 조형이 반듯하고, 조각 문양은 섬세하며 조금 나은데, 아마 원명원에서 옮겨온 석사자로 보인다.
전루 북쪽 정양문 성문 앞에도 한 쌍의 석사자가 있는데, 역시 명대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정양문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옮겨온 것이다.
과거 명나라 황성의 정문 대명문에 있던 것으로 청나라 시기에는 대청문으로 변경되었으며, 1912년에는 다시 중화문으로 개명되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천안문 광장 중앙이다. 1954년 천안문 광장 건설과 함께 중화문이 철거되면서 중화문 앞에 있던 석사자가 정양문 성루와 전루 사이로 옮겨졌다. 그후 베이징 지하철공사와 함께 다시 이동되어 현재 정양문 성루 문앞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원래 대명문에 있었던 이 석사자는 정양문 전루 앞의 석사자와 그 전체적인 조형이 비슷하며, 국보적인 차이가 존재하며, 모두 명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글 / 梁欣立, 번역편집/김기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