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황제 同治皇帝 (1862—1874年)
청 목종 동치황제 (清穆宗同治皇帝) 이름은 재순 (载淳), 애신각라 (爱新觉罗)싸다. 함풍 6년 (1856年) 2월 23일생으로 자금성 저수궁 (紫禁城储秀宫)에서 태어났다. 청 문종 함풍황제(清文宗咸丰皇帝)의 독자다. 함풍 11년 (1861年) 함풍황제 임종 전에 황태자로 정해졌으며, 10월 9일에 황제에 즉위, 년호는 동치 (同治)다.
재순은 겨우 6세에 즉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복잡하고 잔혹한 정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섰다. 함풍제는 임종 전에 왕팔 대신에게 정무 보조를 부탁했다. 그럼에도 재순의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그 생모 자희태후(慈禧太后)에게 수렴청정(垂帘听政)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결국 대권은 자희태후와 혁흔(奕訢)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함풍11년(1861) 10월 9일, 재순이 즉위하고 얼마 후, 자희와 자안태후(慈安太后)는 양심전(养心殿)에서 재순을 데리고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며, 이로 부터 재순의 꼭두각시 황제생활이 시작되었다.
청조는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内)" 정책 하에 동치조는 먼저 태평천국봉기, 념군봉기, 운남회민봉기, 귀주묘민봉기를 진압하고, 외국 침략 세력이 2차례 아편전쟁으로 부터 얻은 실리가 많았기에, 청정부는 외교적으로는 관용정책을 펼쳐 국내외 정세가 약간 평화로워 졌다. 이 잠깐의 시기를 봉건 사학자들은 "동치 중흥(同治中兴)"이라 미화하기도 한다. 실제적으로 동치황제는 이 기간 책만 잃었을 뿐, 어떠한 정무 참여는 없었다.
동치11년 (1872), 재순은 17세가 되었으며, 태후 둘은 권력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순의 친정은 여전히 자희태후의 간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자희태후는 향락을 위해서, 동치황제에게 원명원을 보수해서 거주할 수 있게 명했으며, 동치제 역시 원명원을 보수한 후 태후가 거주하면 태후의 관여를 벗어날 수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재정이 부족하고, 원명원의 파손 정도가 심각하여, 반대가 있었으며 공사는 시작되었다.
동치제는 친정 2년이 채 되지도 않고, 병으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원명원 회복 공사 역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동치 13년(1874), 재순은 천연두로 인해 양심전 동난각(养心殿东暖阁)에서 19세 나이로 죽었다. 묘호는 목종()이며, 청동릉 혜릉(惠陵)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