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清明)하면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를 떠오르기 마련이다. 청명절은 답청절이라고도 불리며, 중춘과 늦봄의 사이, 즉 동지 이후 104일째 되는 날로 중국의 전통 명절 중의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제사 명절 중의 하나로, 조상 제사와 성묘를 하는 날이다.
개자추(介子推)의 전설
전설에 따르면 춘추시기, 진나라 공자 중이가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길에 인적이 없는 아득한 곳에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모두가 매우 초조해하고 있을 때, 신하 개자(介子)가 으슥한 곳으로 가서 자신의 허벅지에서 고기 한 조각을 잘라내어 고깃국 한 그릇을 끓여 공자에게 마시게 하였다. 이게 공자 중이는 점점 기운을 차렸고, 중이는 개자추의 헌신을 알게 되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19년 후, 중이는 국군, 즉 진 문공(晋文公)이 되었다. 즉위 후 문공은 당초 그의 망명에 동행한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유독 개자추를 잊었다. 많은 사람들은 개자추에게 이는 불공평하다며, 문공을 만나 상을 받으라고 권했지만, 개자추는 공을 다투고 상을 받으려는 건 경멸했기에, 그는 짐을 꾸리고 노모와 함께 조용히 면산(绵山)으로 은거하였다.
진 문공이 소식을 듣고 부끄러워서 몸소 사람을 데리고 가서 개자추를 만나려했으나, 그는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 면산까지 찾아갔으나 길이 험하고 나무가 우거져 있어 두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 계략을 써서 삼면에서 산을 불태워 개자추가 나오게 하자 했다. 큰불이 온 산을 태웠지만 개자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큰불이 꺼진 후에야 사람들은 늙은 어머니를 업은 개자추가 오랜 버드나무에 앉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나라 문공이 이 상황을 보고 통곡했다.
장례 입관할 때 나무 구멍에서 옷자락을 발견했는데, 옷자락에는 "살을 깎아 군주를 심기는데 정성을 다하며 주공께서는 항상 청명하시기를 빕니다." 라 적혀있었다.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진 문공이 이날을 한식절(寒食节)로 정하라고 명령했다. 이듬해 진문공이 중신들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다가, 오랜 버드나무가 죽자 이를 청명류(淸明柳)라 하사하고 천하에 알려 한식절 다음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는 전설이다.
청명절의 발전 과정
청명은 최초에 절기의 명칭이었을 뿐 조상을 기리는 명절로 변한 것은 한식절(寒食节)과 관련이 있다.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 볼 때, 불을 금지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은 주로 고대 중국인의 불과 관련된 풍습을 반영한다.
원시사회에서 선조들은 나무를 비벼 불을 얻었기에, 불씨를 얻기는 쉽지 않았고, 불을 얻는 나무의 종류는 계절의 변화로 인해 끊임없이 바뀌었기 때문에, 불을 얻고 새로운 불씨로 바꾸는 것은 고대인들의 삶에서 큰 사건이었다. 춘삼월은 한창 불을 바꿀 때이므로 사람들은 새 불이 들어오기 전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지했다. 한나라 시기에는 한식절을 금연절이라고 불렀는데, 이 날은 백성들이 불을 들지 못하였고, 밤이 되어서야 궁중에서 촛불에 점등하고, 그 불씨를 귀족 친척과 중신의 집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한식절의 풍습은 주로 찬 음식을 먹고 무덤을 청소하는 것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옛날에는 집안에 사람이 죽었을 때 무덤 구덩이를 파서 안장만 하고 봉분 표시를 하지 않고 주로 종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무덤을 파면서 봉분을 쌓고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물질적 뒷받침이 수반되었다. 전국시대에는 묘제의 풍조가 점차 강해졌다. 진한 시대에는 무덤을 제사 지내는 풍조가 더욱 성했다.
당나라 시기에는 선비나 서민을 막론하고 한식절 성묘를 근본의례로 여겼으며, 청명이 한식절과 가깝기 때문에 청명절까지 성묘를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시인들도 종종 한식과 청명을 함께 언급하는데, 예를 들어 위응물은 '청명 한식이 좋다 봄 정원에 백화가 핀다'는 시구가 있다. 조정에서는 민간의 한식·청명절 병행이 관행처럼 이어져 왔다는 점을 감안해 공식 문서로 청명이 오면 한식절과 함께 휴가를 낼 수 있도록 했다. 이 규정은 1200여 년 전으로 청명절이 일종의 국가 법정 명절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나라 때부터 청명절은 일찍이 등장한 또 다른 명절인 상사절(上巳节)의 내용을 흡수하였다. 상사절은 옛날에는 음력 3월 3일에 열렸는데, 주요 풍습은 봄나들이, 제사(목욕재계, 기복, 액막이)를 하는 것으로, 답답한 겨울을 보낸 후의 사람들의 심리적 요구를 반영한다.
송원 시기에 청명절은 점차 한식절에 종속된 위치에서 한식절를 대체하는 위치로 상승했다. 이는 성묘 등의 의식이 대부분 청명절에 행해지는 것은 물론 찬 음식, 축국, 그네뛰기 등 한식절의 풍습도 청명절에 모두 흡수되었다는 뜻이다.두 개의 오래된 명절이 어우러진 청명절은 마침내 송원 시기에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중심으로 한식 풍속에서 상사절 봄 나들이 등의 행사와 융합시킨 전통명절을 만들어냈다.
명청시기에는 대체로 전대의 옛 제도를 계승하였으며, 청명절은 여전히 봄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명절이었다. 중화민국 시대에 청명절에는 벌초, 성묘와 봄나들이과 같은 기존의 관습 외에도 나무를 심는 것이 일상적인 항목으로 되었으며, 이는 실제로 오랫동안 지속된 나무 심기 풍습에 대한 공식 인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