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문화 중추선 6. 천안문 성루

2019-03-04

천안문 (天安门)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베이징의 중심이며, 고궁박물원의 남단에 위치하며, 천안문광장과 장안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대지면적은 4800평방미터다.

천안문은 과거 명청시기 베이징 황성의 정문이었으며, 명나라 영락15년 (1417년)에 처음 건설, 당시 명칭은 '승천문(承天门)'이었는데, '하늘의 계시에 따라 명을 따른다 (承天启运、受命于天)'의 뜻을 지닌다. 설계자는 명대 궁전의 건축장인 콰이샹 (蒯祥)이다. 청나라 순치 8년 (1651)에 '천안문'으로 개명했으며, '하늘의 명을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 (受命于天,安邦治国)'는 의미를 갖는다.

* 天安门城楼 

천안문 성루 위에 오르려면 별도의 안전검사와 티켓구매 필요 

천안문 성루 개방시간 : 08:30~16:30。

티켓 : 15元。

 

* 천안문 성루 건축 기본 구조

천안문은 성대와 성루로 조성되어 있다. 한백옥석의 수미좌에 성루에는 60개 주홍색 원기둥이 있으며, 지면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다. 높고 크며 색채가 농후한 성대위에는 2층의 중처마 누각이 있으며, 황색유리기와에 장식되어 있다. 면적은 동서 9칸, 남북 5칸 크기로, 황권의 '구오지존(九五之尊)' 을 상징한다.

남북 양면에는 모두 36개 무늬문이 있다. 청정, 문틀, 대들보 등의 모두 금룡채회와 길상도안을 조각해 그려넣었다. 내부에는 450kg의 팔각궁등과 각 350kg의 16개 육각궁등이 뭇별들이 달을 모시는 도안을 형성하고 있다.

천안문 성루의 장식 도안 조각은 매우 꼼꼼하며, 주홍기조 위에 금색점선으로 윤곽을 잡고, 대범하면서도 귀한 분위기가 넘친다.

* 천안문은 누가 설계 건조했나 ?

천안문은 원래 명청시기 황성의 정문으로, 명 영락18년 (1420)에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3층 누각식 목패방 형식으로 승천문이라 불렀다. 청 순치8년 (1651)에 오늘날의 양식으로 재건하고, 천안문으로 개명했다.

천안문 성루의 설계자는 명나라 초기 건축대가 콰이샹(蒯祥)이다. 그는 수공장인 집안 출신으로, 건축구조의 설계와 제도에 능했으며, 건축학 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수치계산에 정통하여, 매번 공사시공 전에 모두 정확한 계산을 하여, 준공이후에 위치, 거리, 크기 등이 설계도와 차이가 없었으며, 기하원리에도 상당히 정통하여 건축예술상 독특한 지위에 올랐다.

명 영락15년 (1417), 명성조가 금릉에서 북천할때, 전국각지의 장인을 모집하였으며, 베이징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준비하였다. 콰이샹은 명 성조의 수행인원으로, 먼저 북상하여, 황궁건설 설계에 참여하였다. 콰이샹의 설계수준이 높은 탓에, 황궁 중대공사의 설계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번째 임무가 바로 황궁이 정문이 승천문의 설계였다.

이 공사는 콰이샹의 계획아래, 영락19년 (1421)에 준공되었으며, 그 성루형태는 오늘날의 모습과 대체로 비슷했다. 다만, 규모가 비교적 작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천안문의 원형이었다. 성문의 건설 후에, 문무백곽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영락황제도 그를 콰이루반 (蒯鲁班, 鲁班은 중국고대목수로, 중국 건축계의 시조로 통한다) 이라 치켜 불렀다.

1644년,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 수령 이자성 (李自成)이 베이징성을 공격하여, 승천문은 전화에 휘말렸다. 7년후에 청나라 순치가 새로 재건하고, 천안문으로 개명하였다.

1966년 3월 8일, 싱타이 대지진의 영향으로 천안문 성루에 변형이 생겼으며, 이에 천안문의 재건을 기획하였다. 후에 재건된 천안문은 9급지진에 대한 항진설계로, 탕산대지진 시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천안문 지붕 위의 짐승상은 무엇?

천안문 성루 대전은 중처마 헐산식 지붕으로, 중간에 용마루 하나가 있고, 용마루 양끝단에는 화려한 용 형 유리장식물이 있는데, 이를 용문(龙吻)이라 한다. 그외 8개의 추녀마루가 있으며, 추녀마루 끝단에도 용문이 하나씩 있는데, 이를 합쳐서 구척봉십룡(九脊封十龙)이란 설법이 있다.

용문(龙吻)은 치문(鸱吻)이라고도 하며, 치미의 형태는 달모양으로, 약간 물고기 꼬리지느러미 같기도 하고, 새 모습 같기도 한데, 사람들은 지붕 위에 이를 장식할 때, 화재를 면하고 재해를 진압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외, 지붕처마의 8개 추녀마루에는 각각 10개의 선인과 짐승상이 있다. 맨앞쪽은 닭을 타고 있는 신선(骑鸡仙人) 상이며, 그위로 용, 봉, 사자, 천마, 해마, 산예, 압어, 해견, 투우 9종의 들짐승 조각상이 있다.

이들은 신물로 최고높은 권리의 상징이다. 어떤 것은 선량한 짐승으로, 길상과 웅위로움의 상징이고, 어떤 것은 신화이야기 속의 짐승으로,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릴수도 있어, 사람들은 그를 지붕위에 둠으로서 화재을 막아달라는 마음을 담았다.

천안문 위의 이러한 짐승상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장식이기도 하며, 또한 중국인이 건축 속에 부여한 부호와 풍수를 표현하기도 한다.

* 천안문 성루는 언제 대중에게 개방되었나 ?

천안문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에게 개방된 것은 1988년 1월 1일부터다. 그 전까지 천안문 성루는 줄돋 '진입금지' 구역이었다.

1988년, 새해 첫날, 천안문 성루는 10위안 티켓 가격으로 대외 처음 개방되었으며, 상점에서 퇴직한 사람이 운좋게 처음으로 천안문 성루를 오른 관광객이 되었다.

그외 외국인으로는 미국 관광객 카터부부가 처음으로 성루에 오른 외국 관광객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천안문 성루 관리직원들은 그들에게 기념증서와 경태람 화분을 증정하기도 했다.

* 천안문 성루의 표어 글귀

천안문 성루 입구문동 위에는 커다란 모택동 사진이 걸려있고, 양측에는 '中华人民共和国万岁'와 '世界人民大团结万岁' 표어가 붙어 있다. 최초에 이곳  표어 글귀는  '中华人民共和国万岁'와 '中央人民政府万岁' 였으며, 서법가 종링(钟灵)의 글체이다. 종링은 중국인민정협 휘장과 중국 휘장 디자이너의 한 사람이며, 인민폐 '中国人民银行' 6글자의 주인공이며, 또 중남해 회인당 앞의 원락 대문, 이문, 수화문에도 그의 글체로 적혔다.

연안(延安)에서 종링의 글체가 아름답기로 알려졌으며, 당시 연안 성벽의 표어는 거의 그의 손으로 쓰여졌다.그후 천안문 성루 표어 제작의 임무를 받아, 모든 재능을 쏟을 결심을 하였다. 허나, 해방 직후인지라, 해방구에서 간체자가 유행이었지만, 북평지구 대대수의 사람들은 번체자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에 종링은 대대수를 위해 번체자로 결정을 하였다.

또 하나, 종링을 어렵게 만든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글씨의 크기였다. 천안문 성루의 붉은 담벽이 매우 길고 큰 탓에, 표어는 한 글자가 거의 방 하나 크기가 되었으며, 이는 종링에게도 도전이 되는 셈이었다.

1950년 국경절, 대국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최초 번체자 표어는  '中华人民共和国万岁! 世界人民大团结万岁!' 로 고쳐졌으며, 후에 다시 또 고쳐지기도 했지만, 모두 종링의 글체다.

*천안문 성루 휘장 뒤면에 누구 이름이 적혀있다 ?

천안문 성루의 국가휘장은 심양 제일선반공장 19호 주초차간의 주조반장 쟈오바이순과 그의 동료가 설계안에 따라 제작한 것이다.

1951년,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성대한 노동절 경축행사에서, 심양제일선반공장에서 주조한 직경 100cm의 금속국가휘장이 정식으로 천안문성루에 걸렸다.

재미있는건, 이 휘장 뒤면에 몇몇 사람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

천안문 성루는 국가최고권력을 상징이자,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으로, 천안문 성루의 휘장 역시 반듯하게 잘 걸어야 하기에, 당시 주은래 총리의 관심 하에, 정확하게 잘 걸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에 그 막중한 책임을 맡은 8명의 기사들 이름이 휘장 뒷면에 적혀졌으며, 후에 이러한 방식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소 : 北京市东城区东长安街天安门

교통 : 지하철 1호선 천안문 동역 또는 서역 하차.

천안문 지역은 안전검사와 신분증 검사를 거쳐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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