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3월 23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이끌고 시바이포(西柏坡)를 떠나, 북평으로 향했으며, 대이사의 목적지는 북평 시내와 20km 떨어진 서교 향산(香山)이었다. 1949년 3월 25일부터 1949년 8월 23일까지, 마오쩌둥 등 중앙 지도자들이 이곳에 단거한 지 5개월밖에 안 됐지만, 신중국 탄생 직전이었다. 이곳은 중국 혁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넘어가는 위대한 전환점, 승리에서 승리로 나아가는 영광스러운 과정을 목격한 곳으로, 이게 명성이 자자하다.
2019년 9월 13일, 산자락에 있는 향산혁명기념관(香山革命纪念馆)과 향산공원(香山公园) 안에 있는 쌍정별장(双清别墅), 내청헌(来青轩), 쌍청 동측 평방, 사친사(思亲舍), 다운정(多云亭), 소백루(小白楼), 여주루(丽瞩楼), 진방루(镇芳楼), 진남방(镇南房) 등 혁명 터가 개방됐다. 개방 첫 주 12만여 명이 찾아, '신중국 초석 다지기'의 역사적 위업을 돌아보고, 중국 공산당원들의 애국초심과 장대한 뜻을 되새겼다.
* 향산혁명기념관 香山革命纪念馆
향산혁명기념관 자리는 향산공원 바깥으로, 홍풍로 길 동편이다. 녹음 짙은 광장을 지나자, 연한 갈색 건물 하나가 유유히 서 있다. 남문 밖에는 28개의 복도 기둥이 햇살이 쏟아지고, 바닥에는 빛의 그림자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모체로 된 '향산혁명기념관' 현판이 높이 걸려 있고, 글씨는 대범하면서도 멋이 있다. 기념관은 건축면적 1만7985㎡에 신중국식 스타일로, 중국 전통의 기념식 건축물의 의식감을 살렸다.
기념관 설계가 정교하여, 28개의 복도 기둥은 중국 공산당이 28년 동안 고군분투한 세월을 상징한다. 기념관 2층 동편에는 '사량팔주(四梁八柱)'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중국 공산당 중앙 각 민주당파와 무당파 민주 인사들이 새 정권을 준비하고, 중앙인민정부를 구성하며, 신중국 탄생을 위해 지은 '사량팔주'의 역사를 의미한다. 동문 밖 광장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는 의미로 높이 19.49미터의 국기봉도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높이 8미터 도입부 홀은 '마오쩌둥 동지 향산'이라는 대형 테마 조형물이 한가운데 서 있고, 뒤편 320㎡의 거대한 유화 속에는 봄산이 웃고 노을빛이 곱게 비친다. 왼쪽은 '도강전투' 부조, 오른쪽은 중국 공산당원과 민주인사 20명이 국사를 상의하고 있다.
향산혁명기념관에는 <신중국 정초-중공중앙 재향산>의 주제 전람이 설치되어 있으며, 향산혁명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다. 전시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베이징 입성', ' 간부시험', '향산 주둔', '전중국 해방 지휘', '신중국 건설 계획', '초심을 잃지 않고 영원히 분투' 5개 부문, 15개 단원으로 구성됐다. 전시는 6000m² 규모로, 참관 동선은 약 900m다. 800여 장의 사진, 신문, 지도, 표와 문물 1200점(실물•문헌•기록물 포함)과 약간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홀에는 한장의 흑백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모 주석이 의자에 앉아 있고, 한 손에는 신분을 들고, 한 손은 무릎에 얹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신문에서 '남경해방'이라는 네 글자가 매우 눈에 띈다. 오른쪽은 '천리강 방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산산이 부서지고, 난징 반동정권이 멸망했다'는 기사 제목이 선명하다. 이 사진은 사진작가 쉬쇼빙이 향산 쌍청별장에서 찍은 것이다. 신문은 1949년 4월 25일자 <진보일보>로 이번에 전시장에 진열됐다.
5월 17일 오전, 향산혁명기념관은 2021년 국제박물관의 날 주제행사를 개최했다. 진귀한 도서 사료들은 해방군 출판사와 북경 출판 그룹이 각각 기증하여 입관하였다. 이 중 '<마오쩌둥 필적>은 소장본으로, '자작시사', '제사제자' ,'서간 편지', '문전서고', '비주찰기' ,'고인시사' 등 6개 부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마오쩌둥 동지의 역사별 희귀 필적 1400여 점이 수록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필적들이 매우 높은 문헌 가치와 사료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것들이 서법 예술의 보배라고 설명한다. 기증된 <성화요원(星火燎原)>은 1979년판, 2009년판, 2019년판으로, 마오쩌둥이 생전에 쓴 책 제목의 홍색 경전으로, 중국 혁명전쟁의 동양 서사시로로 불리며, 주더(朱德)•저우언라이(周恩來)•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서문을 작성하거나, 제사를 쓰거나, 직접 원고 쓰거나 하여, 중국 혁명의 전투 과정을 전면적으로 회고한 대형 회고록 총서이다.
주소 : 北京市海淀区一棵松路与卧佛寺西路交叉路口东南侧( 서교선 향산역 입구 맞은 편)
* 쌍청별장 双清别墅
향산공원 동문에서 들어오면, 양옆으로 단풍이 이어지고, 20분가량 걸어가면, 향산혁명기념지 터의 안내판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쌍청 별장이 있다. 이곳은 일찍이 마오쩌둥 동지의 집무 거주지였다.
원락의 문은 고풍스럽고, 문 위에는 해서체의 "쌍청별장(双清别墅)" 네 자가 양각되어 있는데, 반듯하고 청초한 글체로, 이는 웅희령의 친필이다 .이곳은 원래 청나라 황실 원림인 향산 정의원 송오운장(静宜园松坞云庄旧址) 터로, 원 내에 두 개의 샘물이 있어, 건륭황제가 샘 옆 절벽에 "쌍청(雙淸)"이라는 두 자를 써 넣었는데, 이로 인해 이름 지어졌다. 1860년과 1900년 영불 연합군과 8개국 연합군의 약탈로 소실되었고, 1917년 웅희령은 향산 동쪽 기슭의 중턱에 유명한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을 세워 자선 및 교육사업에 힘쓰며, 평생 애국하며 국민을 구했다.
원 내에 들어서면 그윽하고 아늑한 환경으로, 대나무 숲, 은행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송백이 우뚝 솟아 있다. 방생지, 몽감정, 대석대, 고경당, 돌병풍, 요왕분, 두꺼비봉, 쌍청천 등의 독특한 풍경은 정원의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나 이곳을 진정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 아니라, 1949년 3월 25일부터 1949년 8월 23일까지 181일 동안, 이곳은 중공 중앙의 지휘센터로 마오쩌둥이 머물렀던 곳으로, '홍색 입성로'의 눈부신 세월을 증언하며 중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서사시를 썼다.
마오쩌둥은 이곳에 단거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천하를 논하고, 웅대한 그림으로 발전시켰을 뿐 만 아니라, 통일 전선을 구축하여 건국 대업을 함께 상의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마오쩌둥이 유명한 <칠률 인민해방군의 난징점령>을 썼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쌍청별장은 단지 남향의 세 칸짜리 하얀색 단층집으로, 마오쩌둥이 사무 생활을 했던 곳으로, 중간은 회의살로, 벽에 커다란 <중국인민해방군 전략정세도>가 걸려 있고, 그림 위에 화살표과 동그라미, 그리고 해방전쟁 당시 적과 아군의 군사력 배치, 중국공산당 중앙의 작전지휘 방략의 궤적이 남아 있다. 동쪽은 사무실로, 넓은 책상 위에는 구식전화와 필묵이 놓여 있다. 사무실이 안쪽에 있는 작은 방은 식당으로, 식탁 위에는 마오쩌둥이 즐겨 먹던 홍소육과 반찬 몇 개가 놓여있다. 서쪽은 침실로, 널찍한 널빤지 침대가 방의 절반 차지하고 있으며, 침대 옆 옷걸이에 기워진 중산복과 속바지가 걸려 있으며, 구멍이 난 가죽 슬리퍼를 침대 밑에 놓여 있다.
* 쌍청 별장 동쪽 단층집(双清别墅东侧平房)
쌍청 별장 동쪽 단층집(双清别墅东侧平房)에는 미국식 윌리스 지프 한 대가 있다. 이것은 특별히 모집된 문물이다. 1949년 3월 25일, 마오쩌둥은 노획한 미국식 지프를 타고, 시위안 공항에서 인민해방군을 사열했다. 쌍청별장 동쪽 단층집에 있는 이 지프는 당시 마오쩌둥이 탔던 지프와 같은 형태다. 지프 차량의 앞부분은 현관문을 향해 늘 대기하며 돌격 준비를 하고 있다. 쌍청별장 동쪽 단층집은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경호처 경호원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 내청헌(来青轩)
쌍청 별장에서 우회전하여 언덕을 오르면, 멀지 않은 곳에 내청헌(来青轩)에 이른다. 계단을 올라 아치형 대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이곳은 주덕(朱德)•유소기(劉少奇)•주은래(周恩來)•임필시(任弼時) 동지의 사무 거주지였다. 내청헌 내부의 주덕•유소기•주은래•임필시 동지가 사용한 가구는 모두 복제품이며, 그 근거로 중국공산당이 향산을 떠날 때 남아 있던 낡은 가구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 천이(陳毅)가 주더에게 선물한 금속책상과 주더가 쓰던 벼루, 주은래가 쓰던 책장, 교직류 겸용 수신기, 임필시가 소련에서 구입한 카메라 등을 볼 수 있다.
최대한으로 1949년 역사의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해, 복원 과정에서 세부적인 부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내청헌에서 주덕, 류소기, 주은래, 임필시 동지의 식탁에 몇가지 음식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메뉴는 다 주의깊게 연구한 것들이다. 이 같은 역사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해, 작업 인원들이 20편 가까운 글을 열람했는데, 여기에는 지도자 동지의 삶과 관련된 기록 뿐 아니라 경호원, 의사, 요리사 등 관련자들의 회고록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임필시의 식당 테이블에는 임필시 동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담긴 사과가 놓여 있다. 임필시 동지는 두 차례 투옥됐고, 건강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고혈압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임필시가 향산에 거주할 때 보건 의사가 일주일에 하루는 금식을 시켜 사과만 먹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주은래의 식탁에는 무찜이 놓여 있다. 주은래 동지 본관은 절강성 사오싱으로 강소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입맛이 비교적 담백하다고 한다. 자료에는 검소하고 검소한 생활로 무, 배추 등 평범한 채소를 즐겨 먹었던 저우언라이 동지라는 기록이 있다. 주은래 동지의 식탁 위에 놓인 무찜이라는 담백한 채소는 그의 소박한 생활 스타일을 보여준다.
쌍청별장과 내청헌 부근에는 사친사(思親舍)•다운정(多雲亭)•소백루(小白樓)•여주루(麗 楼樓)•진방루(鎭芳樓)•진남방(鎭南房) 등이 있다. 사친사는 중국공산당 선전부가 있던 곳이고, 다윈정은 중국공산당 중앙도서관이 있던 곳이고, 여주루는 향산 전용 전화국, 진방루와 진남방은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의 기밀처가 있던 곳이다.
주소 :北京市海淀区香山公园 내
번역 : 실습생 자오솽 北京旅游网 赵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