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 궁궐 역사_명 황제 11 정덕제 (1506—1521年)

2020-02-29

정덕황제 正德皇帝(1506—1521年)

명 무종 정덕황제 (明武宗正德皇帝) 이름은 주후조(朱厚照), 홍치4년 (1491년) 9월 24일생이다. 명 효종 홍치황제 (孝宗弘治皇帝)의 장자다.

명  무종 주후조는 좀 특이한 황제다. 그는 31년을 살았는데, 역사에 3가지 의구점을 남겼다. 하나는 그 신세에 대한 미스테리, 두 번째는  대장군이 되고 싶어했지 황제를 원하지 않은 점, 세 번째는 죽을 때까지 즐긴 점이다.

정덕제는 재위기간,  일찍이 태자궁에서 지내던 환관 유근(刘瑾) 등 8인과 함께, 밤낮으로 향락만을 추구했으며, 이에 사람들은 8인을 가리켜 팔호 (八虎)라 불렀다.  대학사 유건(刘键) 등이 이에 8호를 죽이고 조정의 기강을 잡았다. 황제 주후조는 8호를 두둔하지는 못했으며,  유건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정직한 대신마저 청소가 되는 등, 조정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유건에 이어 전녕(钱宁), 강빈 (江彬) 등 충신을 임용했다. 그는 황제를 원치 않고 그저 대장군을 원했으며, 정부는 충신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친위병을 데리고 궁을 나서 돌아다니며, 자신을 대장군, 대사, 진국공 등으로 불렀으며, 게다가 대신을 시켜 대장군 명의로 명령을 내리리도 했다. 대신들은 유건의 세도 속에서  기괴한 일임에도 말 못하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주후조의 정력은 매우 왕성하여, 종일 향락의 즐거움에 빠져 지냈다. 그는 자금성의 엄격함에 불만이 들어, 즉위 후 얼마 안가  서원 태액지 (西苑太液池) 서안에 궁궐구역을 건설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표방(豹房), 신방(新宅)이라 불렀다. 표방의 건설 구조는 매우 복잡해서, 상하 2층에 밀실이 함께 만들어졌다. 주호조는 이곳에서 미녀,  악사, 중, 도사, 술사 들을 광범위하게 모집하여 한껏 즐겼으며, 걸핏하면 수 십일에서 길게는 몇 달씩 자금성을 비웠다. 주호조는 또 변방 사진 수비군을 불러와 표방 운동장에서 전투진을 펼치게 하였는데, 이를 외사가군(外四家军)이라 했다.

명 무종은 명나라 역사상 가장 황당한 황제의 하나다. 그는 최초에 팔호를  신임하며, 종일 쾌락만 쫒아 정치는 어두워지고, 조정이 부패하면서, 반란도 일어났다.

정덕 15년, 주후조는 남방 순찰 중에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지고, 베이징에 돌아온 다음 해에 표방에서 죽었다. 묘호는 무종(武宗), 베이징 창평 강릉(康陵)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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