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600년, 탄생에서 지금까지

2020-09-11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이 2020년  600세가 되었다.

자금성은 명청 시기 500여 년의 왕조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과거 봉건 왕조 시기 황실의 궁전이었던 자금성은 오늘 날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 변했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자금성은 세계 최대의 궁궐 건축군이다. 

남북 길이는 961m, 동서 폭은 753m, 사면에는 높이 10m 성벽 담장이 감싸고 있으며, 성벽 바깥에는 폭 52m의 호성하가 있다. 

현 고궁박물원에는 180여 만 개의 소장품이 있으며, 그중 일급 소장품은 8000여 개에 달한다. 

자금성은 중국 역사의 변천을 지켜보았으며, 수 많은 역사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고궁박물원, 즉 자금성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다. 

1. 황궁의 건설 

명 영락4년 (1406年), 명 영락황제 주체(明永乐皇帝朱棣)가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긴다고 명했다.

이것이 베이징 자금성이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다.

<후한서 后汉书> 기록에,  "하늘에 자미궁은 상제의 거주지이며, 제왕의 궁은 그것을 본 따 만든다 天有紫微宫,是上帝之所居也。王者立宫,象而为之) 라 기재되어 있다. 

명 황제의 궁궐은 자금성 (紫禁城)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당시에 자금성은 일반인이 진입할 수 없었다. 

자금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영락황제는 사람을 보내 사천 지역에서 나무를 구했는데, 공사에 필요한 대량의 목재를 갖추는 데 10여 년의 시간을 사용했다. 

영락 18년 (1420年) 까지, 무수히 많은 장인들이 지혜를 모아, 궁전이 마침내 완공되었다.  이때가 자금성이 출생한 날이다.

초창기의 자금성은 운이 그다지 좋지 않아 여러 차례 번개를 맞기도 했다. 

1421년, 완공 몇 개월 된 3대전(三大殿)이 번개를 맞아 불에 탔다. 20년 후 1441년에 3대전이 겨우 재건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건되고 오래되지 않아, 3대전은 가정년간, 만력년간에 두 차례나 번개로 인해 큰 불이 났다. 

그리고 1957년 고건축 보호를 위해 피뢰침을 설치하고 나서야, 자금성은 번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2. 중국 봉건왕조 역사의 증인 

자금성을 거쳐간 주인은 몇 이나 될까? 

답을 먼저 이야기 하자면, 명나라 영락황제부터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까지 총 24명의 황제가 있었다. 

명 영락황제 주체가 자금성을 건설하였다. 

명 가정제가 자금성을 개조하였는데, 궁전의 내외 배치 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1644년은 자금성이 큰 변화시기에 해당한다. 

명 숭정제가 경산에서 자살하고, 베이징을 공격한 이자성이 자금성 무영전에 올라 황제라 칭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청나라가 중원의 새주인으로 들어왔으며, 도르곤이 무영전 앉아 정치를 하였으며, 곧 청 순치제가 베이징에 입성했다. 

자금성의 형태와 모양은 주인에 따라 변화를 가졌다. 

청 순치 20년 (1655年) , 청 왕조는 심양 청녕궁을 본 따 곤녕궁(坤宁宫)을 개조했는데, 이는 만족과 한족의 문화가 융합한 전형적인 사계다.

청 옹정원년 (1723年), 옹정황제는 양심전(养心殿)을 거주공간을 삼았다. 이때 부터 후대 8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거주하고, 조정을 살폈으며, 양심전은 청나라 역대 중요한 사건을 지켜본 셈이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 (溥仪)가 퇴위를 선포했다. 

1924년, 부의 등 황실 성원이 차례로 자금성을 나갔다. 

이때부터 자금성의 황권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며, 점차 궁문을 열게 되었다. 

 

 

3. 고궁박물원의 수난

1925년, 자금성은 고궁박물원 (故宫博物院) 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근대시기 당시는 불안정한 시대로, 전란으로 인하여 자금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1931년, 918 사변(九一八事变) 후에,  자금성과 그 문화재의 안위와 보호는 곤란한 문제가 되었다. 

1933년,  산해관이 외침으로 뚫리자, 고궁박물원 이사회는 문화재의 이동을 결정하였으며, 2000여 개의 문화재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문화재는 최종적으로 중국 항일전쟁의 최후방인 사천으로 피난을 갔으며, 항전 승리 후에야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1949년 신중국 성립 때까지, 전란을 거친 자금성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당시에 자금성을 청소할 때 운송 된 폐기물은 25만 입방미터였다. 

1949년 5월, 고궁 고건축 수선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과거 황궁의 모습이 점차 회복되었다. 

1987년 12월, 세계문화유산대회에서, 자금성은 세계문화유산 명단에 수록되었다. 

4. 핫 플레이스, 고궁 

2002년, 자금성 백년 대보수(百年大修)프로젝트가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자금성은 인기 관광지로 점차 부상했다. 

2013년, 고궁박물원은 처음으로 문화창의 상품 공모전을 열었다. 그후, 고궁박물원은  황궁문화와 새로운 트랜드를 융합한 각종 문화상품을 개발했다. 

최근 몇 년 간, 자금성의 개방 면적은 해마다 확대되었으며, 전시 공유된 문화재도 점점 더 늘었다. 

과거 봉건왕조의 황궁에서 황실의 박물관,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으며, 이제 문화창의를 가미한 세계적인 문화 브랜드로서 발전해가고 있다.

 2020년 고궁박물원은 자금성 600주년을 기년하며, 다양한 행사와 전람을 개최했다. 

 

번역/편집 김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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