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석사자, 중국 고대문화의 일부분

2020-05-18

중국 고건축의 대문 입구에는 보통 석사자(石狮子) 한 쌍이 있다. 암수 한 쌍으로 조성되며, 매우 위엄있는 표정이다. 사자는 원래 중국의 본토 동물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 고건축에 자리하게 된 것일까?

일찍이 한나라 시기에 황하 유역의 중원사람들인 서방과 교류를 진행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자가 최초에 중국에 전해진 것은 서한 시기이며, 정식 문자 기록은 <한서 서역전(汉书·西域传)>에 나오는데,  당시 사자는 조정에 대한 선물로서, 중원에 들어왔다. 또 다른 이야기 중에는 불교 유입시기에 사자 (狮子)의 단어가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사자는 매우 사나운 육식동물이며, 맹수의 이미지가 신화되어, 사람들은 중국 고대 신화 속의 신수 산예(狻猊)와 비교적 흡사하다고 여겼다. 문수보살이 현성하여 오대산에서 설법하러 올 때에, 사자에 올라탔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사자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길상의 상징으로 삼게 되었다고도 한다.

사자 조형조각은 최초에 무덤 앞에 놓여져 그 무덤 주인에게 사악한 기운과 화를 피하게 하는 수호신령의 역할이었다. 후에 사자 조형의 신수는 점점 커져, 그 주인의 권세와 부귀를 표현하였고, 통치자는 궁궐 문앞에 사자상을 놓아 그 위엄을 과시하였는데, 사람들이 점차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석사자는 사원입구, 마을 입구, 다리 난간 심지어는 자기 집 문 앞 등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설치하면서 좀 더 대중적인 건축 장식물이 되었다.

베이징 중추선(中轴线) 상에는 고건축이 많으며, 사자상 역시 수십 쌍이 있다. 석사자, 도금사자, 동사자를 포함하여 급별이 가장 높은 사자상에 속하며, 베이징성의 최고 사자상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봉건사회 속에서 이러한 사자상은 역대 제황이 황권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신수로 사용하였으며, 또 문 앞의 장식물로도 작용했다. 이러한 사자상의 조형과 제조과정은 중화민족의 높은 공예와 예술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 고대문화의 일부분이다.

봉건 통치 사회 속에서 생산력은 낙후되었고, 역대 제왕들은 권력 전쟁을 통해 그 영토를 확대했으며, 궁궐을 지으며 황권의 권위를 드러냈다. 궁궐의 다양한 장식 중에서 문 앞에는 신수(神兽)를 설치했는데, 모든 과정이 장인들이 큰 돌을 깎고 쪼아서 수공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돌사자의 제작은 먼저 산속에서 원석을 구해야 하는데 , 돌 사자의 크기에 적합한 돌 한쌍이 필요하기에 먼저 두 덩어리의 적합한 원석을 구했다.  밑그림을 그리고 대략의 형체를 만들고 다시 세부 조각을 하고, 표면을 가는 등의 공정을 거친다.

후에는 철, 동, 옥, 나무, 대나무 등의 재료를 이용하여 만든 신수 사자로 발전하였으며, 점차 각종 조형의 사자 시리즈가 나왔다. 이는 중화민족의 공예와 예술의 정수를 포함하며, 중국 고대 민족문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현재도 베이징의 오랜 석사자 상은 중화민족의 상징적인 물건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베이징 시내 지구 중추선에 자리한 사자상과 주요 사자상을 소개한다. 

- 전문 정양문(正阳门)의 석사자들

- 천안문 금수교(天安门 金水桥)의 석사자

- 자금성 외조 태화문  (太和门)의 동사자

- 자금성 내정 건청문 (乾清门)의 도금사자

- 자금성 어화원 (御花园 堆秀山)의 석사자 분수대

- 경산 수황전(寿皇殿) 석사자

- 베이징  최초의 당대 석사자

- 중산공원 사직단(社稷坛) 남문의 석사자

- 조어대 국빈관 (钓鱼台 国宾馆)의 도금 사자

- 백탑사(白塔寺) 원대 석사자

- 북해공원 영안교(北海公园 永安桥)의 석사자

- 향산 정의원 (香山公园 静宜园)의 동사자

글 梁欣立 / 번역편집 김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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