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금수교 석사자, 명대 석사자상의 대표

2020-05-24

천안문(天安门)은 명청시기 베이징 황성의 정문이었다. 천안문 앞에는 금수하(金水桥)가 있으며, 금수교 남북에 각각 석사장 한 쌍이 남쪽을 바라보고 놓여 있다.

<중국사자예술> 서적 중에는 "이 두 쌍의 석사자 조각은 명대 영락15년(1417)의 것이며, 높이는 2.5미터, 기좌를 포함하면 3미터를 넘는다. 머리위에는 13개의 돌기가 있는데, 당시 규격에 따르면 이는 최고 등급의 석사자를 뜻한다" 라고 적혀 있다. 또, <중국석사자 조형예술> 서적에는 "금수교 남북에  각각 석사자 한 쌍이 있으며, 베이징에서 가장 큰 석사자로, 높이는 3.4미터다. 목을 들고 머리를 살짝내리고, 가슴을 펴고 있으며, 근육이 견실하며 용맹함이 느껴진다. 조형이 아름답고, 활력이 있으며, 멀리서 보면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라 적혀 있다.

이 석사자 상은 조각 비율이 조화롭고, 큼직한 눈에, 머리는 살짝 기울어져 있으며, 머리 위 갈귀털은 나선형 소용돌이 형태가 잘 정리되어 있다. 앞 가슴에는 크지않은 동그란 엽전 문양이 있고, 목에 걸린 비단띠에는 방울과 술이 붙어 있다. 석사자의 돌은 회백색 중에 옅은 회백색 반점이 있으며, 자연 풍화 저항능력이 강한 돌이며, 바위 한 덩어리를 조각해서 만들었다. 좌우 사자의 석질과 조형, 크기, 공예는 모두 같아, 동일 시기에 동일한 장인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나라 석사자 조각상의 규범이며, 북방 석사자 형태의 대표격으로 중국 고대 석사자 중에서 가장 정통의 황실 석사자 작품이다.

금수교의 석사자와 관련해서는 민간 전설이 하나 있다.

명조 말년, 이자성(李自成)이 농민군을 이끌고 베이징을 점령할 때, 승천문(현 천안문) 앞에서 한 바탕 전투가 벌어졌다. 이자성은 말을 타고 승천문 앞에 도달하여 활을 쏴 승천문 편액을 맞히자, 사병들의 갈채가 이어졌으며, 이자성은 창을 들고 금수교에 올랐는데, 갑자기 석사자가 달려들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게다가 명나라 패장 이국정(李国桢)이 사자 뒤에 몸을 숨겨 정탐을 하고 있었다. 이자성은 창을 들어 힘껏 석사자의 배를 찔렀으며, 이에 석사자는 비명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석사자의 배에는 창에 찔린 상처가 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금수교 석사자의 배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을까? 필자가 실지 관찰을 해보니, 다리 동북쪽 석사자 복부에는 비슷한 구멍이 있었으나, 결코 창에 맞은 흔적은 아니었으며, 석재 자체의 하자였다. 민간 전설은 역사 기록이 아니나, 그냥 구경 해보는 것은 괜찮다.

금수교에 놓여진 두 쌍의 석사자는 봉건통치 권력의 기세를 잘 표현해주며, 고대 예술 심미관과 석각 공예의 수준을 함께 내포한다. 실제로 4마리 석사자 상은 약 600년의 자연풍화와 사회변천의 과정을 거쳤으며, 국부적으로 보수도 거쳤다.

원래 금수교 남쪽의 화표(华表)와 석사자는 천부랑(千部廊)의 끄트머리에 있었으나, 1950년 장안거리 확장 공사 중에 화표와 석사자를 북쪽으로 6미터 가량 옮겨, 지금 금수교 남쪽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1999년에 석사자에 보호용 난간을 설치하여, 명나라 시기 석사자를 잘 보호 하고 있다.

글 / 梁欣立, 번역편집/김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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