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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령 역사, 팔달령에는 언제 처음 장성이 건설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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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의 건축은 오랜 역사 세월 속에서 점차 완성된 것으로, 건축의 시작부터 최후 완성까지는 2천여 년의 시간이 들었다.



저명한 장성 학자 뤄저원(罗哲文)은 아름다운 시문을 통해 만리장성의 역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춘추시기부터, 진한을 거치고 요금을 이어 원명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의 시간.

무수히 많은 장군과 사졸, 장인과 동물들까지  온갖 힘을 모아 건축한 위대한 공정.


굳센 의지, 지혜, 피와 땀 이런 것들이 중국에 거대한 국보를 남겼다. "




꽤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이 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모르고 있지만, 이는 역사 사실이다.


비록 그가 장성을 최초로 건축한 자가 아닐지라도, 중국 최초의 통일황제로서, 진시황은 확실히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넓은 강토의 북방에 길게 이어지는 장성을 건축하였다. 그때부터, 장성은 진시황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으며, 오천년 중화문명 역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럼 팔달령에는 언제 처음으로 장성이 건설되었을까?

 


진시황 이전의 춘추전국시기, 전쟁이 빈번하고 격렬해지며 규모도 커지면서, 군사 건축기술도 함께 광범위하게 발전되었다. 각 제후국은 인접국의 돌발적인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 변경지역에 관(关), 새(塞), 정(亭) , 장(障) 등의 방어 시설을 건축했으며, 후에는 이러한 시설들을  성벽으로 연결하며 발전시켰으며, 이렇게 하여 초기의 군사방어 공정인 장성이 출현하였다.




전국 후기에, 흉노 등 유목부족의 침략이 날로 커지고, 끓임없이 남하하여 강탈을 하였다. 진, 조, 연 삼국은 변방에 거대한 규모의 장성을 건조하고, 유목 부족의 침략을 방어했다.

팔달령은 군사 전략 요지로서, 그 중요성은 춘추전국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팔달령 소재지는 당시 연국의 북 경계로, 상곡군(上谷郡) 관할이었다. <춘추좌전 春秋左传>과 <사기 史记> 기재에 따르면, 전국 칠웅의 하나인 연국이 팔달령 일대에 군사 방어 시설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북방 소수민족 산융(山戎) 일부 중요 부락이 군도산(军都山) 북자락의 구이촨 분지(妫川盆地)에서 300여 년간 생활했다.  산륭 부족은 부단히 관구를 넘어 연 나라를 침략하였으며, 기원전 663년 산융은 다시 연국을 침범했는데,  이때 제단공(齐桓公)이  직접 군을 이끌고 산융을 정벌하여, 연국을 구했다.




연 소왕(燕昭王)이 기원전 295년에  조양(造阳, 현 怀来大古城 )에서부터 양평(襄平 현 辽宁辽阳县)까지 장성을 건축하고 산융 부락의 침략을 방어하였는데, 이것이 팔달령 지구에 지어진 최초의 장성 연장성(燕长城)이다.




베이징시 문물 부문에서는  팔달령 주변이 서발자(西拨子), 영성자(营城子) 일대에서 서쪽에서 동북으로 이어지는 수 십리의 연 장성 잔벽과 돈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고찰 발견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하면서, 전국 제후들의 분쟁 국면을 끝을 냈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봉건 집권국가를 완성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북방 흉노 부족의 침략을 방어하고, 변경의  방호를 강화하기 위해, 진시황은 대장 몽염(蒙恬)과 태자 부소(扶苏)를 파견하여, 30만 군대와 수 십만 인부를 동원해 9년의 시간을 거쳐,  이전  삼국(秦、赵、燕) 변방 장성의 기초 위에, 대규모로 보수, 확장, 연결, 증축을 하여 군사방어 공정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의 진나라 만리장성이다.


(번역 나는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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