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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장안거리 600년의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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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3월 22일, 베이징시는 2017년 연말까지 55km 장안거리와 연장선상의 도시가구, 표지 시스템, 정부시설, 도시조명, 도로, 부대시설, 녹화경관 등에 대해 전체적으로 중국풍으로 리뉴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600 여년 역사를 가진 이 거리는 또 다시 시대의 변혁을 반영하게 될 예정이다.

장안거리의 변화를 앞두고 지난 600년의 변모를 근대사를 중심으로 간단히 되집어 본다.

(1890년, 청 광서16년, 동장안거리상의 낙타행렬)

 

명,청시기: '장치구안(长治久安)'의 십리거리.

아주 오래전 장안거리(长安街)는 원래 없었다. 원나라 시절 장안거리의 위치는 원대도(元大都)의 남부 성벽이었다. 명나라 초기 북경성을 확장건설할 때, 남부 성벽이 지금의 숭문문(崇文门), 선무문(宣武门)으로 이동하면서, 원래 성벽자리가 동서방향의 거리로 되었으며, 그 길위에 장안좌문(长安左门)과 장안우문(长安右门) 및 동단패루(东单牌楼), 서단패루(西单牌楼) 등을 세웠다. 

(1920년, 동장안거리상의 북경반점 北京饭店, 멀리 동장안가패루 东长安街牌楼 가 보인다.)

명 영락17년(明永乐,1419년), 대도성 남쪽벽을 남쪽으로 2리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문명문(文明门)과 순승문(顺承门)사이의 성벽을 길로 바꾸고, 장안거리(长安街)라 하였으니, 지금까지 약 60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장안거리, 그 명칭은 중국 역대 13개 왕조의 옛 도성 '장안(长安)'에서 따온 것으로, 장치구안(长治久安, 오래동안 안정되고 태평스럽다)의 의미를 담는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한서 고의전(汉书·贾谊传)>중 기재된 '건구안지세, 성장치지업(建久安之势,成长治之业)' 문구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역시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명청시기, 장안거리는 동쪽 동단(东单)에서 부터 서쪽 서단(西单)까지로 전체 3.7km 거리고, 십리장가(十里长街)라고도 불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 : 장안거리 동서를 관통시키다.

청조 황제의 퇴위에 따라, 천안문광장과 장안거리의 격식이 파괴되었다. 1912년, 장안좌문장안우문의 담벽(红墙)을 철거함으로, 동서 장안거리가 관통되었으며, 천안문광장도 역시 대외개방되기 시작했다.

 

1937년 북평함락 : 부흥문(复兴门), 건국문(建国门)을 열다.

 1939년, 북평을 점령한 일본군은 베이징 서교를 개발구로, 동교를 공업구로 할 계획이었으나, 성벽이 동서교통의 장애가 되었다. 이에 일본군 당국은 북평내의 동서 성벽에 입구를 트고, 동쪽을 '계명문(启明门)', 서쪽을 '장안문(长安门)'이라 불렀다. 이 두개의 문은 문동(门洞, 동굴형 통로), 문산(门扇, 문짝형식) 등 형식도 갖추지 않고, 단지 성벽을 갈라 틈을 만들었다. 이에 백성들은 '빠진 이빨(豁子)' 이라고도 불렀다.

(1957년 건국문)

(1954년 부흥문)

 

1945년, 일본이 투항후에 베이징시민들은 일제강점시기에 만들어진 명칭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며, 민국 북평시정부는 당시 유행한 '부흥', '건국' 등의 정치구호에 따라, 일제가 명명한 장안문을 '부흥문(复兴门)'으로, 계명문을 '건국문(国门)'으로 개명했다.

1946년 11월, 하사원(何思源)이 시장직을 이어 받은 후, 부흥문에 10미터 너비의 아치형 문동을 건설하고 철문을 보태었다. 1955년, 도로확장을 위해 부흥문 문동이 철거되고, 성벽틈을 넓혔다. 건국문은 이때도 문동을 만들지 않아, 줄곧 성벽틈새 상태로 있었다.

 

1949년:베이징 제일거리(北京第一枪)로 개조하다.

 1949년 신중국 성립후, 장안거리에 대한 일련의 개조를 진행했다. 건국초기에 국경 열병식이 매년 한차례 진행되었는데, 장안거리상의 문(门楼)과 패방(牌坊)은 행렬대오의 통과에 방해가 되곤했으며, 군 깃발도 어쩔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지나야했기에, 해방군 동지들이 특히 화를 냈다.

(1949년 개국대전 열병식 장면, 장갑차부대가 장안좌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

행렬군중은 천안문에 도착하여 모주석을 보는 것을 목빠지게 고대하였으나. 어떤때는 행렬대오가 오후가 되어도 천안문을 통과하지 못해, 모주석을 볼수가 없었다. 이에 장안좌문(长安左门)과 장안우문(长安右门)의 철거계획이 제시되었다. 베이징시정부 역시 이 두개의 문이 차량과 행인 통행에 불편하다고 느끼고, 철거를 희망했다.

 

1952년 : 옛도시의 보호와 신시대로 발전, 그 갈림길.

 베이징시의 도로 개조와 확장건설과정중, 량사성(梁思成, 고건축학자)과 베이징시 부시장 오함(吴晗)사이에 논쟁이 발생했다. 량사성은 성문과 패루, 패방은 베이징 성의 독특한 경관으로, 합리적인 계획에 따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무원에 있었던 방기(方骥)선생은 량사성과 오함의 일차충돌을 기억했다. 량선생이 국무원 회의석상에서 옛 도시의 패방, 유리궁문 등 고건축은 보존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오함은 장래 베이징성은 도처에 고층빌딩이 들어설 것이며, 그 밑에 깔린 패방과 궁문은 모두 닭장처럼 보잘것 없게 될터인 즉, 어찌 문화재로 가치가 있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화가난 량선생은 그 자리서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연경십경중 하나인 장안분탑 长安分塔)

 

결국 1952년, 장안좌우문이 철거되었다. 그후 몇년 안되어 동서장안거리 패루, 쌍탑사(双塔寺), 중화문(中华门)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언급할 만한 것은 서장안거리의 전보건물(电报大楼) 부근의 쌍탑이다. 일찍이 연경십경(燕京十景)중 하나인 장안분탑(长安分塔)으로 불리웠으며, 50년대 유명 고건축학자 량사성은 이미 쌍탑의 보호방안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방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쌍탑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쌍탑 철거전, 이른새벽 서단패루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큰 길 남북으로 마주서 있는 두개의 탑을 볼 수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면서 탑을 다시 바라보면 두개의 탑은 모두 경수사(庆寿寺)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되며, 게다가 두 탑이 매우 가까이서,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쌍탑이 철거되면서, 이러한 경관도 이제 옛 경관이 되었다.

 

(1959년 3월, 베이징 동장안거리 개조공사장면, 사진:신화사)

 

1958년 : 필요할 때 활주로로 사용한다.

1958년, 국경10주년을 맞이했다. 국경10주년, 장안거리는 처음으로 대규모개조를 맞았으며, 가장 넓은 곳은 120미터로 확장되었다. 모택동(毛泽东)은 천안문 광장의 개조를 지시했는데, '기백있고, 웅장하며, 100만명 집회가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으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

당시 '10대 공정' 오인 영도소조의 성원중 하나였던 심발(沈勃)은 천안문 성루위에서 모택동의 지시를 들었다. 원래 장안좌문장안우문자리에서 남쪽으로 정양문까지의 개발을 지시했으며, 지시에 따라 천안문은 동서 너비 500미터, 남북길이 860미터로 넓히고, 천안문 앞의 큰길은 100미터가 넘어 동시에 120명이 횡렬로 대열을 갖추어 지날수 있도록 하였다.

장안거리의 너비와 관련되어서 <고도북경 50년 변천록(古都北京五十年演变录)>중에서 동광기(董光器)는 넓직한 장안거리의 너비는 군중행렬과 열병식외에도 전략적인 고려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마스터플랜 의견수렴중에 군부쪽의 의견은 도로가 넓다면 전쟁시기에 활주로로 사용가능하며, 만약 천안문 상공에 폭탄이 터진다면 도로가 넓을경우 일종의 분리대로 작용하여 화재가 번지는 것을 방지할수 있다고 하였다.

 

(1959년 10월 1일, 국경 10주년 70만명 퍼레이드. 멀리 새로지어진 인민대회당이 보인다)

(1958년, 천안문 광장지역에 대한 개발모형)

 

이와 동시에, 장안거리 양측에 인민대회당(人民大会堂), 혁명역사박물관(革命历史博物馆), 군사박물관(军事博物馆), 민족문화궁(民族文化宫) 등 정치색 강한 건축이 추가건축되었다. 이때부터, 이전에 세워진 각 정부기관 건축과 함께 장안거리는 정치적 이미지를 가진 유명 거리가 되었다.

국경 10주년후, 장안거리 개조계획중 대극원(大剧院)과 과기관(科技馆)이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점에,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연기되며, 결국 장안거리 건설이 잠시 보류되었다.

(1976년 4월 4일, 천안문광장에서 운중들이 주은래 총리를 애도하고, 사인방 四人帮을 규탄하고 있다.) 

 

문혁 10년, 장안거리의 건설은 정체되었으며, 총 건축면적은 1959년 10대건축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문혁시기 장안거리의 건설은 적었지만, 그 운영면에서는 가장 강했던 시대다. 1200만 홍위병이 이곳에서 모택동 시찰을 받았으며, 닉슨 중국방문시와 주은래총리 송별시에 군중들로 가득했었다.

1985년, 장안거리의 계획은 개혁개방후 다시금 일정에 올랐다.

 

개혁개방 : 상업적 자극, 장안가식 경제, 

개혁개방 후, 장안거리의 임대료는 폭등하였으며, 개발회사들은 장안거리 개발에 뛰어들고, 각 은행들도 가세하면서 국가기관 사무실과 대형 문화시설은 더이상 임대료를 버틸수 없어 장안거리를 떠나게 되었다.

1985년 후, 장안거리에 자리한 국가기관 사무건물은 11개가 남았으며, 외교부는 신화문 남측이나 장안거리 북측을 고려했으나, 결국 동2환 도로로 가버렸다. 전국 부녀연맹 사무빌딩도 대부분 기업에 팔려 호텔과 사무동으로 되었다.

(1999년, 새로 건설된 동방광장, 사진: 宋连峰)

 

<국가인문역사(国家人文历史)> 보도에 따르면, 장안거리상에 1990년대 새로 지어진 21개 건축중, 상업금융과 사무빌딩이 14개로 67%를 차지했다. 50년대에는 이 비율이 17%였다. 왕푸징(王府井) 인근, 이가성(李嘉诚) 투자의 동방광장(东方广场)이 바로 이 시기의 전형적 사례다.

(2014년 6월말, 서장안거리의 대대적 보수를 시작, 전체길이 6.88km)

 

통계의 따르면, 개혁개방이후 장안거리의 대규모 보수는 네차례로 1987년 아시안게임 맞이, 1997년 홍콩반환, 1999년 건국50주년 경축과 2009년 60주년 경축때다.

2014년 6월 28일 밤 11시, 장안거리는 또 다시 난리스루(南礼士路)에서 우커숭(五棵松)까지 대규모 수리를 했다.

 

(장안거리 야경)

600년의 장안거리에는 수 많은 역사이야기가 있다. 어느 저녁무렵 장안거리에 나서 그 이야기를 발견해보길 바란다.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6-04-11 0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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